‘정’이라는 단어는 한국어 사용자조차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그러나 이 낯선 단어가 독일 유치원 교과서 속 ‘감정 교육’ 영역에 소개되기 시작했습니다. 감정보다는 관계를 강조하는 이 한국적인 정서가 어떻게 서양의 교육 모델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을까요?
“공감” 이상의 감정, 정(情)을 가르치기 시작한 독일
독일 함부르크 지역의 일부 유치원에서는 최근, ‘관계 속 감정 다루기’ 교육 자료에 한국의 ‘정(情)’ 개념을 포함시켰습니다.
아이들에게 정(情)을 가르치는 수업은 단순히 ‘친구를 이해하자’는 수준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쌓이는 애정과 책임감을 이해시키는 교육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독일 교육계에서 ‘공감(Empathie)’이라는 단어가 너무 즉각적인 감정 반응에 머물러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습니다. 반면 한국의 정(情)은 시간, 경험, 상황 속에서 형성되는 느리고 깊은 감정으로, 일회성이 아닌 관계 기반의 지속적 감정이라는 점이 서양 교육자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정의 경험’을 직접 배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 한 아이가 울고 있을 때, 그 아이를 곁에서 지켜보는 친구의 역할
. 같은 장난감을 계속 같이 쓰며 쌓이는 우정
. 서툴러도 도와주고 기다려주는 경험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정은 단지 ‘좋아하는 마음’이 아니라, 인내와 배려, 책임감이 함께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으로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왜 지금 서양 교육은 ‘정’에 주목하는가?
최근 독일과 북유럽 교육계는 ‘정서 지능(EQ)’과 ‘사회적 관계 능력’의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감정 표현은 많아졌지만, 정작 아이들이 관계를 맺는 능력은 떨어지고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나왔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은 단절된 인간관계를 다시 잇는 개념적 도구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정’은 말하지 않아도 느끼는 감정, 말보다는 행동과 시간이 말해주는 감정, 그리고 불편함 속에서도 끈을 놓지 않으려는 관계 유지의 정서입니다.
독일 교육연구소의 한 보고서는 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정은 단지 감정의 상태가 아닌, 삶의 태도이자 관계를 맺는 기술이다.”
아이들에게 ‘정’을 설명하기 위해 ‘할머니의 밥상’, ‘비 오는 날 친구를 기다리는 아이’, ‘다툰 후 사과 대신 반찬을 건네는 형’ 등의 사례가 동화로 구성되어, 독일 교육 현장에서 점점 확대되고 있습니다.
또한 정은 경쟁보다 협력, 성과보다 과정, 개인보다 공동체에 집중하는 한국식 정서 문화의 핵심 개념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이는 공동체의 해체와 고립감이 심화되는 서구 사회에 하나의 대안적 감정 모델을 제시한 셈입니다.
문화가 감정을 번역하는 방식: 정은 번역될 수 있을까?
‘정’이라는 단어는 영어로는 한 단어로 정확히 번역하기 어렵습니다. ‘affection’, ‘bond’, ‘empathy’, ‘attachment’ 등 여러 단어가 조합되어야만 유사한 의미가 전달됩니다. 이 점에서 정은 단순한 감정이 아닌 문화가 구성한 감정체계로 볼 수 있습니다.
독일 유아교육 전문가들은 이에 착안해, 정을 ‘문화 감정 모델(Cultural Emotional Model)’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감정을 단지 생물학적 반응이 아닌, 문화가 빚어낸 정서적 습관으로 접근하려는 시도입니다.
한국의 정은 말로 드러내기보다는 몸짓과 행동, 눈빛과 시간의 누적으로 표현되는 감정이기 때문에, 독일 교육자들은 아이들에게 말보다 행동 중심의 ‘정 표현 놀이’를 권장합니다.
예를 들어 ‘마음이 담긴 인형 전달하기’, ‘마음일기 그리기’, ‘감정 색칠하기’ 등의 활동을 통해 정서와 관계를 동시에 배웁니다. 결국 정은 단순히 한국 문화의 특수한 정서가 아니라, 인간이 관계를 맺는 깊은 방식 중 하나로 보편화되고 있는 중입니다.
마무리하며
‘정’은 참 설명하기 어렵지만, 설명이 되지 않아도 전해지는 감정입니다. 그 미묘하고 섬세한 감정을 이제 독일의 아이들도 배우고 있습니다. 말 대신 행동으로, 경쟁 대신 기다림으로, 이해 대신 곁에 머무는 것으로. 한국의 문화는 이렇게 또 하나의 방식으로 세계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유행하는 K-직장 문화: 회식, 호칭, 그리고 수평적 팀워크’를 주제로, K-조직문화가 글로벌 스타트업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